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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석굴암

펜션에서 차로 15여분 거리에 위치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큰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51년 공사를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한다. 총 공사기간은 24년이다.

토함산의 유래

"첫째,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에서 토함산이라 부른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기 많은 바다바람의 영향으로 산 정상 부근에 안개가 머무는 날이 많다.둘째, 토함산의 산신령이 된 석탈해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탈해를 토해라고도 한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셋째, 토함산지역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불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고, 토함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견해 등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은 사람들이 사는 땅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표현된다. 신라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성시 한 토함산에 부처님 나라를 만들었다. 불국사(佛國寺) 이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님 나라가 된다.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고 절을 세운 산지가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불국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천왕문을 통해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는 백운교, 청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가 있고 안쪽에는 석가탑, 다보탑, 무설전으로 구성된 대웅전영역과 이보다 조금 낮은 축대 위에 세워진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등으로 구성된 극락전영역이다.불국사를 정면에서 살펴보면 석가정토의 대웅전이 아미여래의 극락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삼층석탑의 기준 - 석가탑 (국보 21호)

석가탑(석가여래 상주 설법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높이는 8.2m, 아무런 조각이 없는 2층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양식이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감은사 탑과 고선사 탑이 지닌 무거운 석탑양식에서 벗어나 날씬한 비례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추상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신라석탑의 기준이 된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하였을 때 세계 최고의 목판본「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다.

신라석공의 솜씨 자랑 - 다보탑 (국보 20호)

다보탑(다보여래 상주 증명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높이 10.4m로 석가탑 보다 조금 높다. 4개 계단이 있는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1층은 속이 보이게 네 기둥을 세웠고, 지붕은 사각으로 기와집의 처마를 달았다. 2층은 사각난간이 있고 지붕은 팔각이다. 3층은 팔각난간과 연꽃이 활짝 핀 원으로 된 지붕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도형을 통해 많은 변화를 주었다.다보탑의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 및 독특한 구조와 표현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 목조건축처럼 만든 신라석공의 솜씨가 놀랍다.

대웅전영역을 하늘에서 보면 탑과 축대의 배치 또한 절묘하다. 단순 소박한 석가탑은 복잡 화려한 범영루 뒤에, 복잡 화려한 다보탑은 단순 소박한 좌경루 뒤에 두어 3차원적인 균형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지닌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범영루와 좌경루의 모습이 다르게 된다. 불국사 축대에는 건축의 기본원리인 좌우대칭의 미를 따르지 않는 독창적인 멋이 숨어 있다. 다보탑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원래는 네 마리가 귀퉁이마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세 개는 사라지고 얼굴이 깨어진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 - 극락전 금동아미타불 (국보 27호)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금동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었고 오른손은 가볍게 다리 위에 얹었다. 곧은 몸과 단정하고 인자한 얼굴 모습은 전체적으로 자비롭고 존엄한 느낌을 준다. 극락전 아미타불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가장 크고 훌륭한 불상으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백률사의 약사여래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본체 - 비로자나불 (국보 26호)

비전은 관음전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다. 화엄경 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로 '빛을 인간세계에 널리 비쳐 준다'는 뜻이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 손가락의 모습을 취하여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깊은 뜻을 나타낸다.비로자나불의 얼굴 모습과 옷의 처리 등 세련된 수법은 지극히 아름다운 형상을 나타내어 신라인의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연화교·칠보교 (국보 22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청운교ㆍ백운교 (국보 23호)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명 : 석굴암 / 지정조목 : 국보 24호 / 위치 :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우주를 상징하는 석굴암 구조

석굴암은 입구에 네모꼴 공간이 있으며 여기서 좁은 통로를 통해 둥근 공간에 이른다. 둥근 공간의 중앙에는 대불이 있고, 그 위 천장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석굴암의 평면구성은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이라는 동양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입구의 네모꼴 공간은 사람이 사는 땅을 상징하고 통로 저편에 있는 둥근 공간은 신들의 나라, 즉 부처님의 나라이다.

부처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네모꼴 공간에 서서 해야 하며 둥근 하늘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부처님 나라를 지키는 조각상들

네모꼴 공간 주위 벽에는 팔부중을 조각했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악신들인데 불교에 수용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착한 신으로 바뀌어 땅을 지키고 있다. 입구 좌우에는 금강역사(인왕상)가 조각되어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 쌍의 힘센 신으로 하체는 치마만 둘렀고, 벗은 상체는 근육의 아름다움과 불끈 솟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정면에서 보면 왼쪽의 금강역사상은 주먹을 굳게 쥐고 입은 약간 벌린 모습이다. 소리를 내면 "아!" 라는 기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아금강역사'이다.

오른쪽 상은 입을 다문 채 손을 펴고 있는데, 소리를 내면 "흠!"이라는 기합 소리가 들릴 듯 한 '흠금강역사'이다열린 세계와 닫힌 세계, 즉 음과 양의 조화는 서로 다른 손 모습에서 완전함을 이룬다.금강역사의 치마끝에서도 힘찬 기운이 뭉쳐있는 느낌이다. 치마 아래 드러나 있는 디딤발의 발가락을 자세히 보라! 엄지 발가락만 강조해 조각하고 나머지 발가락은 바위에 붙여 버리고 세부를 표현하지 않았다.운동선수가 디딤발에 힘을 줄 때 엄지발가락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움직이는 자세를 자세히 연구하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천년 전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대의 과학기술

석굴암 현재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이는 1913년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해 수리할 때 외벽을 모두 시멘트로 발랐다. 그 결과 동해로부터 불어오는 습기가 많은 바람이 석굴 안과 밖의 기온차이를 유발해 석굴암 내부에 이슬이 맺히게 된다. 이슬 맺힘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1961년 또 한차례의 철근콘크리트로 이중 돔을 씌우고 유리창으로 입구를 막고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였다.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는 과학기술시대에 천 삼 백년 전에 해결한 습기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조상들의 지혜에 놀랄 뿐이다. 부처님이 계신 둥근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 좌우에는 사천왕이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다스리는 수호신으로 온몸을 화려하게 무장하고 무기를 들고 있다.

석굴암 주실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는 가운데 당당하고 원만한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고, 주위 벽둘레에는 범천, 제석천, 보살, 십대제자와 십일면관음보살 등이 있다. 다시 그 위로 열개의 감실을 만들고 여덟 분의 보살들을 모셔 놓았다. 석굴암의 조각상을 모두 합치면 본존을 포함해 38체가 된다. 둥근 법당 한가운데에는 높이 3.5미터의 본존불인 석가여래가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 오랜 세월동안 크게 깨어진 곳 없이 온몸에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얼굴과 어깨, 손, 무릎 모든 신체 부분이 원만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에 나타난 옷 주름은 생동감이 있다. 얼마나 간결 한 옷 주름인가, 진실로 세상 이치를 모두 깨우친 이의 모습이다. 석굴암 주실의 천장은 반원형으로 크기가 다른 108개의 돌이 질서 있게 짜 맞추어져 있다. 둥근 천장은 고대의 천문관과 불교의 우주관을 상징한다. 감실 위쪽부터 5단의 천장석은 위로 갈수록 좁게 쌓아 둥글게 만들었는데, 제3단부터는 방사선 형태로 30개의 주먹돌(돌못)을 끼워 기하학적 구성을 보인다. 주먹돌의 역할은 천장 돌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과 함께 주먹돌(돌못)의 머리가 각각의 천장석을 잡고 있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다.